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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대회 옥한흠 목사의 설교
이용원 2010-09-07 추천 0 댓글 0 조회 1086

"주여 살려 주옵소서" /계3:1-3

할렐루야,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모처럼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서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예배에 저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이 설교를 맡게 된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를 가로막는 악한 종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00년 전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 들인지 불과 반세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도 3, 4만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약한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찾아오셔서 성령의 불을 부어주셨습니다. 원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평양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에 연이어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년 사이에 수십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나라가 기울자, 교회는 사경회라든지, 삼일운동이라던지, 사회계몽에 앞장서면서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끌어안아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순교의 피를 흘려 한국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가능케하는 뿌리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평양 대부흥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전무후무한 은혜를 100년 전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찬양하며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평양 대부흥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특별히 주목해야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함께 강력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러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죄를 자복하도록 몰아붙이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회개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 위에 임하였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그것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밤새도록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숨은 죄를 토해놓았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회개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백년 전의 부흥을 다시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까.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백년전과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우리 안에 있든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는 회개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 이래서는 안된다는 탄식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백년전과 같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 중에 임하셔서 성령의 불,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는 회개의 영을 한국교회에 다시 한 번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들어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고, 기분이 좋지 않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꽤 고집을 피웠습니다마는 주님은 밤낮 이 말씀에만 매달리도록 종을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전하고 싶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른 손에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 교회를 위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이름이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사데교회는 평판이 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아 그 교회 대단하지" 하면서 인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데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랬동안 그 후광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뭐 하나 흠을 잡을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데교회안 에는 몇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데교회를 보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기적같은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합니다. 5만의 교회, 천만의 성도, 세계 최대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제단의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1만여 명의 선교사, 많은 헌금, 큰 교회당 등 자랑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세계를 다녀보십시오. 한국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우리를 쳐다봅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목회자가 참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목사보다 더 헌신하는 평신도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자존심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보고 행위가 죽었다고 하면 저는 그 말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닙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러한 확신을 흔들어 놓는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오래전부터 하위권입니다. 교회에 들어왔다가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종교자들에게는 기독교가 제일 인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 사랑 하면서 교회에서 왜 그렇게 잘 싸우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자기들보다 더 정직한데가 어디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돈을 사랑하는데는 자기들하고 똑같다고 봅니다. 사회의 각종 스캔들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끼어도 이제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이러한 비난을 받으면서 한마디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도덕성, 가치관, 처세관을 놓고 보면 세상 돌아가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짠 맛을 잃으면, 우리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짖밟히도록 내 던지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지 않는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르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실까요? 누가 ''아니요''라고 변명할 목사가 있습니까? 아니라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평양 백주년의 진정한 기념은 이런 우리의 영적인 비참함을 직시하고 가슴을 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일곱 별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자는 교회의 지도자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왜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거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은 살아도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하였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던지, 회개라던지, 순종이라던지, 거룩이라던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한다면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 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켜가는 설교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는 놀라운 복음을 발견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의로운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비텐부르크에서 34년간 4000번 이상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루터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곡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죄 좀 지었다고 그게 뭐가 대단한거냐면서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도시는 믿음의 방종이 난무하는 타락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을 보면서 루터는 자기의 설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설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설교하기 보다는 차라리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것이 났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터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면서 믿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 열매가되는 행위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면 입만 살고 행위가 죽어버리는 사데교회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하여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가능하면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자는 청중에게 인기가 있어서 사람을 많이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에게 있다고 질책하신다면 나는 아니라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몇이나 됩니까? 평양 대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 시킨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답답한 일은 우리의 힘으로 회개가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은 수없이 할 수 있으나, 죄를 끊어버리고 단호하게 돌아서는 거룩한 결단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년 전 하디 선교사가 하던 회개, 길선주 장로가 하던 회개, 무명의 성도들이 밤새도록 추운 겨울 밤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회개를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회개는 한국교회에서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암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고, 세상 앞에 새 옷을 갈아입으려면, 성령께서 회개할 힘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고 버리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능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백 년 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셔서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성령의 불, 회개의 영을 다시 부어달라고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부르짖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줄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죽은 행위를 벗어버리면, 아직도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온전한 복음을 회복하면 온갖 더러운 죄로부터, 그 죄에서 나는 악취로부터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다시 입으면 북한의 무너진 교회를 우리 모두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거룩한 불이 타오르는 용광로가 되면 주님께서 21세기 세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에 우리 한국교회를 불러주실 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따라합시다.

주여, 한국 교회를 살려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살려주옵소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옵소서.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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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대회 옥한흠 목사의 설교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입만 살아있고 행위는 죽은 목회자였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

지난 2007년 7월8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며 진보와 보수를 넘어 한국교회가 한자리에 모인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설교자로 나선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울먹이며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는 10만명의 성도들에게 눈물의 회개와 영적 각성을 눈물로 호소했다.

요한계시록 3장 1~3절을 본문으로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며 폐부를 찔렀던 그의 설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메아리친다. 당시 옥한음 목사님이 선포했던 설교 전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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